이쯤되면 도장깨기다. 데뷔작 1998년 '조용한 가족'부터 최근작 2018년 '인랑'까지 10여편의 단·장편 영화를 만드는 동안 김지운은 전작의 흥행 여부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다. 그래서일까, 데뷔 20년이지만 김지운 영화는 늘 신선하다. 장르마스터로 나아가는 그의 작품 역사를 간략하게 훑어본다.

 

'조용한 가족'(1998) 코미디+호러

데뷔작은 잔혹극에 담은 코미디였다. 서로에게 무관심해 늘 조용한 한 가족이 산장을 개업한다. 드디어 첫 손님을 받지만 다음날 아침 손님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다음 투숙객도 하필이면 동반자살을 계획한 남녀다. 그러나 둘 중 남자가 살아나고 가족 중 한 명이 얼떨결에 남자를 살인한다.

영화는 자살과 살인, 시체 유기 등의 공포스러운 설정 사이사이에 유머를 섞어 아이러니를 자아낸다. 음산해 보이는 가족 풍경에서 구성원들의 행위는 코믹하게 어설프다. 김지운은 독특한 색채의 이 영화에 IMF로 인한 정리해고 등 사회의 잔인한 현실을 녹여 주목을 끌었다.

 

'반칙왕'(2000) 코미디

차기작은 코미디였다. '반칙왕'은 송강호의 슬랩스틱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송강호는 은행 창구를 지키는 단조로운 일상을 사는 은행원 임대호로 분했다. 임대호는 잦은 지각, 부진한 실적으로 부지점장에게 욕먹는다. 짝사랑하는 은행동료는 임대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의기소침하게 지내던 임대호가 찾은 해방구는 엉뚱하게도 '장칠삼 프로레슬링체육관'이다.

임대호는 마스크를 쓰고 과장된 액션 연기로 링 위를 휩쓴다. 온갖 야비한 술수를 총동원하는 건 물론이다. 그래서 '반칙왕'이다. 은행원 임대호와 레슬러 '타이거 마스크'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반칙왕'은 사회 주류에서 밀려난 이들의 모습으로 풍자와 공감을 풀었다.

 

'장화, 홍련'(2003) 공포·스릴러

'반칙왕'의 거친 액션과 웃음기는 사라졌다. 대신 일가족의 아름답고 슬픈 비극이 피었다. '장화, 홍련'은 고전소설 '장화 홍련'을 토대로 한 공포영화다. 수미(임수정)와 수연(문근영)은 재혼한 아빠 무현(김갑수)과 함께 아름답지만 신경이 예민한 새엄마 은주(염정아)가 사는 시골의 목재 가옥으로 이사한다. 그러나 첫날부터 가족들은 이상한 기운을 느낀다.

김지운은 '장화, 홍련'을 통해 본격 공포·스릴러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미쟝셴에서도 뛰어난 성취를 이뤘다. 인물들이 사는 집은 그 자체로 이국적인 신비와 괴기스러움을 뿜어 극을 지배한다.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점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네 가족과 그 사이의 갈등, 후반부에 드러나는 진실, 인상적인 OST까지 '장화, 홍련'은 한국 공포영화의 수작으로 불린다.

 

'달콤한 인생'(2005) 누아르

블랙코미디의 씁쓸한 웃음과 호러의 오싹한 슬픔을 뒤로 하고 김지운이 선택한 것은 파국으로 치닫는 누아르 액션이었다. '달콤한 인생'은 냉철하고 명민한 완벽주의자 선우(이병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푼다. 선우는 보스인 강사장(김영철)로부터 총애를 받아 애인인 희수(신민아)의 외도를 추적한다. 그러나 선우는 점점 희수에게 느껴선 안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위험한 선택을 한다.

'달콤한 인생'은 한남대교에서의 싸움 장면과 폐창고에서 벌인 1대 12의 육탄전 등으로 액션 누아르로서 호평을 받았다. 특히 주인공 내면의 고독과 결말의 모호함은 강렬한 여운을 남기며 마니아층을 모았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웨스턴

1990~2000년대 한국에서 1930년대 만주로 모든 시대적·공간적 배경을 바꿨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다양한 인종이 뒤엉키고 총칼이 난무하는 무법천지 1930년대 만주의 축소판 제국 열차에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격동기를 살아가는 조선의 풍운아, 세 명의 남자가 운명처럼 맞닥뜨리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정우성, 이병헌, 송강호라는 호화 캐스팅에 각 배우들이 맡은 강렬한 개성의 캐릭터들,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서부극(웨스턴) 형식의 액션, 추격전과 미쟝셴 등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서사는 최대한 단순화하고 액션과 캐릭터 설정에 공을 들여 쾌속으로 질주하는 짜릿함을 남기며 '만주 웨스턴' 장르를 탄생시켰다.

 

'악마를 보았다'(2010) 스릴러

'악마를 보았다'는 김지운의 영화 중 가장 잔인하다. 국정원 경호요원 김수현(이병헌)은 약혼녀가 잔인하게 살해당하자 가장 고통스러운 복수를 다짐하고 범인인 연쇄살인마 장경철(최민식)에게 처절한 응징을 시작한다.

김수현의 복수는 장경철에게 죽을 만큼의 고통을 가하고 놓아주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악마를 보았다'는 복수에 사로잡혀 점점 악으로 물들어가는 수현과 흥분한 살인마 경철, 두 사람이 광기에 스스로 잡아먹히는 모습을 표현해 제한상영가 판정을 두 번이나 받기도 했다.

 

'라스트 스탠드'(2013) 액션

김지운은 2013년, '터미네이터' 시리즈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손잡고 액션 영화를 만들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김지운의 첫 영어 영화 연출작이다. 헬기보다 빠른 튜닝 슈퍼카를 타고 멕시코 국경을 향해 질주하는 마약왕(에두아르도 노리에가)과 아무도 막지 못한 그를 막아내야 하는 작은 국경 마을 보안관(아놀드 슈왈제네거) 사이에서 벌어지는 생애 최악의 혈투를 그린다.

'라스트 스탠드'는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처절한 액션, 하이테크 무기로 다투는 전투신, 슈퍼카로 펼치는 묘기에 가까운 레이싱 등으로 흥행을 노렸다. 그러나 영화는 '익숙한 팝콘 무비'라는 평과 'B급'이라는 평 사이에서 안타깝게 흥행에 참패했다.

 

'밀정'(2016) 첩보 누아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썼다면 '밀정'에서는 1920년대 냉전체제의 경성과 상하이를 이용했다. 1923년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은 무장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뒤를 캐기 위해 리더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하고,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라는 극단의 두 남자는 갈등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점차 가까워진다.

암투와 회유, 교란이 난무하는 '밀정'은 김지운의 새로운 첩보물이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가 쌍방간에 새어나가고 상황은 점점 첨예해진다. 상하이와 경성 거리, 총독부 등 다양한 건물 인테리어, 하이라이트인 기차 내부는 조명·색감·디자인 면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인랑'(2018) SF 액션

김지운의 최신작은 SF다. '인랑'은 '공각기동대'로 유명한 일본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SF 명작, 1999년 장편 애니메이션 '인랑'을 원작으로 한다. 배경은 남북한 정부가 통일준비 5개년 계획을 선포한 후, 강대국의 경제 제재가 이어지고 민생은 악화된 근미래다. 통일에 반대하는 반정부 무장테러단체 '섹트'를 잡기 위해 대통령 직속 경찰조직 '특기대'는 인랑이라는 인강 병기를 육성한다.

김지운은 '인랑'을 통해 근미래를 그리는 SF는 물론 총격전과 카 체이싱, 육탄전을 담은 액션, 강동원과 한효주라는 근사한 두 배우의 멜로, 배신과 암투라는 누아르 코드까지 한 번에 담아 하이브리드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다. '인랑'은 오는 25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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