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김혜자에게 ‘국민엄마’ 타이틀보다 ‘국민배우’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을까.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연출 김석윤/극본 이남규, 김수진)가 김혜자의 등장과 함께 시청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뛰어난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드라마의 관성으로 오랜시간 ‘엄마’를 강요받았던 배우 김혜자에게 ‘눈이 부시게’는 새로운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동시간대 경쟁작들만 보더라도 2~30대가 주류를 이루는 평일 10시대에 김혜자는 전에 없던 캐릭터와 호흡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 톱스타들의 엄마 ‘김혜자’

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에서 ‘톱스타’라는 수식어가 붙는 배우 중에 김혜자와 공연해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 90년대말 2000년대 초를 장식한 톱스타라면 누구나 김혜자의 아들딸 역할로 분해본 적이 있다. 최민수, 고현정, 고소영, 최진실, 이광수, 원빈에 이르기까지 김혜자는 수많은 스타들의 탄생을 곁에서 목도한 배우이기도 하다.

의외로(?) 김혜자와 한번도 연이 닿지 않았던 김혜수는 최근 인터뷰에서 ‘같이 연기해보고 싶은 배우는 누구냐’는 질문에 “그동안 김혜자 선생님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선생님이 허락하신다면 좋은 작품에서 꼭 한 번 연기해보고 싶다”고 답했을 정도.

 

♦︎ 이토록 다른 얼굴의 엄마

대중에게 김혜자라는 이름은 따뜻하고 인자한 우리네 엄마처럼 인식됐다. 하지만 김혜자는 엄마라는 사회적, 가정적 지위 안에서도 다채로운 변화를 시도해왔다. 1999년 영화 ‘마요네즈’에서 김혜자는 최진실과 세상 누구보다 가깝지만 환멸을 느낄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는 엄마를 연기했다. 우리가 말하는 모성이 조건없는 관용의 상징이라면 ‘마요네즈’ 김혜자는 철없고 고집스럽게 늙어버려 딸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하는 엄마를 구축해냈다.

2008년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기성의 관성을 벗어나 ‘탈주부’를 꿈꾸는 엄마로 변신했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던 ‘엄마’의 틀을 과감히 깨고 자식과 남편으로부터 독립을 꾀하는 김한자 캐릭터는 큰 사랑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는 김혜자로 시작해 김혜자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 아들 도준(원빈)이 세상이나 다름없는 엄마의 삐뚤어진 모성애는 강렬한 이미지들과 점철돼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 동시대의 ‘여성’을 대변하는 배우

사진=영화 '만추'(1982)

김혜자는 1961년 KBS 서울중앙방송 공채 1기 탤런트로 데뷔했다. 하지만 연수를 채 끝내기도 전에 결혼을 했고, 이후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연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해 27세에 다시 연극 무대에 서며 1969년 MBC 개국과 함께 본격적인 연기자의 행보를 시작했다.

영화 ‘만추’(1983)에 출연한 김혜자는 당시만 하더라도 파격적인 혜림 캐릭터를 많아 유려한 연기력을 선보였다. 살인죄, 장기수 등 당시의 시대상에 파격적인 여성 캐릭터를 맡아 열연을 펼치며 마닐라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품에 안았다.

사진=(위) KBS 2TV '엄마가 뿔났다', (아래) tvN '디어 마이 프렌즈'

드라마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직은 마흔아홉’, ‘두 여자’에서는 급진하는 한국 사회 속에 보수적인 가치, 그리고 인간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의 삶을 재조명했다. ‘엄마가 뿔났다’는 여권신장을 외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엄마라는 독립적인 위치에 고립된 중년 여성의 삶,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는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는 치매를 앓고 있는 노년의 여성을 통해 그녀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 누구의 엄마도 아닌 김혜자

사진=JTBC '눈이 부시게'

‘눈이 부시게’는 김혜자에게도 새로운 연기 도전이다. 25세의 김혜자를 한지민이, 70대의 김혜자를 김혜자가 연기한다. 결국 육체만 다른 한 캐릭터를 두 배우가 공연하는 셈. 극중 설정상 25세의 김혜자가 아버지(안내상)를 구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다 70세로 노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사실상 김혜자는 25세의 천진함을 연기해야 한다.

그리고 어제(18일) 배우 김혜자 스스로도 “생전 처음 경험해보는 드라마다. 어떤 드라마와도 비슷하지 않다”던 70세 김혜자의 본격 활약이 시작됐다. 방송 직후 시청자들은 “김혜자에게서 한지민이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라고 호평을 쏟아내고 있다. 단순히 한지민을 잘 흉내냈다는 뜻이 아니다. 김혜자는 25세의 천진함과 불도저같은 면모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부모보다 더 늙어버린 스스로를 보면서도 가족을 지켰다는 안도감에 눈물짓는 입체적인 캐릭터를 이질감없이 선보였다.

드라마가 가진 설정을 무리없이 시청자에게 전달하며 ‘누구의 엄마’가 아닌 ‘70세 김혜자’로 우뚝 선 배우 김혜자. ‘눈이 부시게’가 이제 방송 2주차에 접어든 가운데 웃음과 감동이 공존하는 웰메이드 탄생에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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