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개봉해 이틀 동안 61만 관객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2위를 지키고 있는 범죄영화 ‘암수살인’(감독 김태균)의 김형민은 이상적인 형사다. 추가 살인 7건을 자백한 뒤 두뇌플레이를 걸어오는 비상한 머리의 연쇄살인범 강태오(주지훈)를 상대하면서도 동료들에게 “무조건 믿고 끝까의 의심하자”고 독려한다. 감정의 큰 기복 없이 정의와 진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이런 인물의 옷을 입은 배우 김윤석 톤도 달라진 느낌이다. 전과 달리 차갑게 내연하는 불길이나 압도적인 에너지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따뜻함과 절제가 대체했다.

 

 

“‘범죄의 재구성’ ‘거북이 달린다’ ‘추격자’ ‘극비수사’ 등 형사 캐릭터를 깨나 맡았지만 강남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범죄자를 일망타진한 적은 없고 주로 시골이나 지방형사, 아웃사이더 형사였다. 직업이 형사이긴 했으나 가장의 이야기였고 드라마에 초점이 맞춰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형사를 맡았다. 형사 대 범인으로 끝까지 승부를 벌이지 않나.”

이번 캐릭터야 말로 가장 점수를 높이 주고 싶은 모습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전에 맡았던 형사들은 형사이기 전에 적당히 때우며 살아가는 공무원이었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바뀌는 캐릭터였다면 ‘암수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을 대하는 태도나 모습이 법의 수호자 형사였기 때문이다.

“김형민이라는 사람이 굳이 형사가 아니라도,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으면 했다. 잘난 척 하는 것도 아니고, 과도한 에너지로 상대를 억누르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자기 자리에서 허언하지 않은 채 차근차근 자기 역할을 해나가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지 않나. 선생님을 하든 옆집 아저씨이든 호감 가는 인물이다. 감독님이 이 시대의 파수꾼 같은 형사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다들 가슴 한켠에 파수꾼 마음을 가지면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보다 나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김형민에 들어가기에 앞서 ‘싸움을 잘하거나 카리스마 넘치는’보다 ‘절대 안 무너지고 쉽게 포기하지 않아서 믿음이 가는’을 그리고 싶었다. 다음으로 밀도 있는 심리전 영화에서 강태오와 단 둘이 만들어가는 6번의 접견실 장면에 포커스를 맞췄다. 밀도 있는 심리전 영화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였기 때문이다.

 

 

“형민이 제일 두려워하는 건 태오가 커뮤니케이션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6번의 만남에서 당근과 채찍전술을 구사하고, 져주기도 하고, 안경과 옷을 사다주는 등 형님 같기도 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저런 말을 하다하다 보면 분명히 실수하는 순간이 있을 거다, 그 순간을 포착해서 퍼즐조각을 맞춰가야 한다는 그림을 그렸다. 이 영화는 접견실에서 시작해서 접견실로 끝난다. 접견실에 기승전결이 다 있기에 연기와 촬영 모두 공들였다. 여기서 승부가 나지 않으면 이 영화는 실패한다고 봤다. 비중이 가장 큰 장면이라 긴장도가 높았다. 특히 온도와 리듬이 달라야 했다. 천편일률적이면 재미없으니까.”

상대역 주지훈과 불과 물, 물과 기름의 이질적인 케미스트리를 적절히 이뤄냈다. 끊임없이 도발하는 주지훈이 창이라면 김윤석은 방패였다.

“외형상 묘한 매력을 과거 드라마 ‘마왕’에서 봤었다. 만화에나 나오는 되게 차갑고 날선 일본미남 느낌인데 웃을 때 보면 순진한 아이 같았다. 태오 캐릭터를 위해 삭발한 채 있는데 아우라가 무척 좋았다. 동양인 얼굴에서 쉽게 뽑아내기 어려운 이미지다. 콧대가 확 날서있고 못되게 보이기도 하고 순진하고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주지훈이 강태오를 연기함으로써 이 영화가 더 여러 결을 갖추게 된 것 같다.”

 

 

서울 토박이인 주지훈이 김윤석의 고향인 부산 사투리 중 최고난도 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한 점에 대해서도 높은 점수를 줬다. 일상의 말이 아니라 주저리주저리 떠벌여야 하는 변곡점 많은 사투리였는데 인토네이션을 잡아냈다는 건 좋은 감각과 히어링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촬영 현장에서 자신은 주지훈이 집중하도록 은연중에 도와주는 것 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상대 배우와 일단은 빨리 친해져야하는 게 지론이다. 보통 후배들과 작업하니 먼저 마음을 열고 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야한다. 사람이 껄끄럽고 어려우면 현장에서도 제약이 생기게 마련이다. 주지훈과는 연결고리인 ‘하정우’ 얘기를 하면서 한방에 친해졌다. 이희준 김소진 진선규는 동문에, 대학로 시절 각기 다른 극단에 소속됐지만 교류하면서 함께 연극활동 했기에 이미 편한 관계가 형성돼 있었다. 검사 역 문정희는 학전에서 함께 뮤지컬을 했던 후배다.

“우리나라 형사물에는 형사 콜롬보와 같은 캐릭터가 없다. 추레한 트렌치코트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느릿느릿 행동하는 것 같으면서도 단서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결국은 범인을 궁지에 몰아넣어 딱 잡아낸다. 주먹 한번 내지르지 않고 수첩과 볼펜만 가지고 웃으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희열이 느껴졌다. 이런 식의 카타르시스를 주는 인물과 시나리오가 그리웠다. 지인 중 한 명은 영화를 본 뒤 ‘배우 개인의 모습이 많이 투영됐네’라고 말해줬다. 표정이나 디테일한 것들이 슬쩍슬쩍 나왔던 것 같다.”

 

 

진부한 질문, 작품 선택 기준을 물었다. 들어오는 시나리오 중 가장 완성도 높은 것을 고른다. 다음으로 배역을 본다. 앞으로도 그 기준을 바뀌지 않을 듯싶다. 이야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서다. 스토리상 긴장감을 주기에 굉장히 좋은 구도라 남자 투톱영화를 많이 고르게 됐는데 조금 더 다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외화 ‘비포 선셋’이나 ‘더 랍스터’처럼 기승전결의 속박에서 벗어난 이야기나 새로운 표현방식의 작품을 곱씹는다.

소망을 이뤘다. ‘암수살인’이 여름 성수기보다 가을에 개봉하기 원했었기 때문이다.

“심적으로 여유가 있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시기에 개봉되면 여운이 오래 남지 않나. ‘완득이’(2011)도 만추인 10월에 개봉했는데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 영화도 그랬으면 했다. 천천히 입소문이 나면서 묻히지 않는 영화, 많이 회자되는 작품이기를 원했다.”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송강호 황정민 설경구와 함께 충무로를 이끄는 연기파 중년 남자배우로 지내온 그는 오늘도 ‘웰메이드’ 상업영화를 기다린다. 늘 두근두근하면서. ‘김윤석이 선택한 영화는 믿고 봐도 된다’란 지침을 품은 관객들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는 책임감이 기분 좋은 부담으로 그를 추동한다.

사진=쇼박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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