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차 베테랑 여배우 김희애. 1980년대 청춘스타로 출발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드라마·영화·광고에서 지성과 우아함의 대명사로 군림해왔다. 표독하고 히스테리컬한 여자(내 남자의 여자), 불륜에 빠져드는 아내(아내의 자격), 20대 청년 피아니스트와 격정적 사랑에 휘말리는 주체적인 중년여성(밀회), 연하 남편을 장식품처럼 다루는 냉혹한 재벌2세(사라진 밤)처럼 ‘여우’처럼 리드미컬하게 변신을 시도했다. 대중이 원하는 고유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고감도 연기력, 영리함 덕분이다.

 

 

김희애가 오는 27일 개봉하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로 또 한 차례 변주곡을 연주한다. 영화는 1992년부터 6년 간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정부에 맞섰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관부재판’을 다룬다. 김희애는 원고단을 이끌고 23번의 재판을 주도한 문정숙 단장을 맡았다. 부산 지역 여성 사업가로 재산을 탕진하다시피 하면서 할머니 10명을 도운 실존 인물이다.

 

◆ 체중 5kg 증량...일본어·경상도 사투리 도전

극중 문정숙은 부산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며 딸과 함께 사는 싱글맘이다. 바쁜 일정 탓에 사무실 안에서 옷을 훌훌 벗고 갈아입는가 하면 감정이 차오르면 폭포수처럼 터뜨린다. 드센 여장부 스타일이다. 일본어 실력도 출중해 재판정에서 할머니들의 통역 역할까지 척척 해낸다. 어색함이 느껴지질 않는다.

 

영화 '허스토리'에서 문정숙 단장 역을 맡은 김희애

“실화 소재 작품이라 어색함이 없도록 하는 게 관건이었어요.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했어요. 촬영 3개월 전부터 연습에 들어간 일본어와 부산 사투리는 일본어 선생님, 어시스턴트 선생님, 배우들이 겹겹이 도와주신 거죠. 중간에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공부를 안해서 벌을 받는구나 반성했어요. 일어의 경우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니니까 언어에 초점을 맞추면 감정이 문제가 되고, 반대로 하면 ‘뭐 저렇게 어설퍼’란 평가를 들을 테니 힘들더라고요. 부산말은 대사를 녹음해 무한반복해서 외웠고요. 언어장벽 때문에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어요. 그나마 일본 배우들과 선생님이 ‘됐다’고 말씀해주셔서 다행이었어요.”

김희애가 안보였으면 좋겠다고 여겼다. 기록에 나와 있는 그분의 사진을 보고 외형적인 부분을 비슷하게 만들려는 차원에서 애초 10kg 증량을 계획했다. 5kg정도 살을 찌웠을 때 민규동 감독이 “그 정도면 괜찮겠다”고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 지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캐릭터 열전

1970년대 김자옥부터 시작해 80~90년대 정애리, 김희애는 지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단골로 연기해온 여배우다. ‘허스토리’는 김희애의 독립적이면서 주체적인 여성캐릭터 열전의 뉴 버전이다. 세대를 초월한 여성들의 연대라는 내용도 그렇거니와 굳은 신념과 대의를 품은 캐릭터라는 점에서 그렇다.

 

 

“여자의 일생을 통해 성숙해 가는 한 여성의 모습을 그려낸 데뷔작 ‘여심’부터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폭풍의 계절’ ‘아들과 딸’ ‘아내의 자격’ ‘밀회’ 등은 누구의 엄마, 이모가 아니라 한 인간의 자기발전 모습, 성숙함을 보여주는 인물들이었어요. 사실 전 공부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아는 것도 별반 없고 해맑기만 한 상태에서 그런 역할을 했거든요. 그래서 지적이라는 이미지가 부담스러웠고, 가식적으로 포장한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마저 들었어요. 결과적으론 배우로서 혜택을 많이 봤죠. 주체적인 역할을 많이 많았고 배우로서 두드러진 퍼스낼러티를 얻었으니 큰 베네핏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성에 대한 관심이 컸다. 지성인을 좋아했다. 부군인 이찬진씨(전 한글과컴퓨터·드림위즈 대표이사)와의 결혼도 그런 이유에서이지 싶다. 남자든 여자든 멋있어 보이고 존경스럽다. 그 어려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사람은 겸손해진다는 걸 그들을 통해 깨달았다. 자신의 빛나는 지성을 티도 내지 않은 채 털털하게 지내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들로부터 얻은 자극으로 김희애는 지금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 나문희부터 이유영까지...김희애가 호출한 ‘여배우들’

‘허스토리’는 굉장히 귀한 작품이다. 여배우 입장에서는 작품 선택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남자배우들보다 많지 않으니까 더더욱 금쪽같다.

“여성, 남성 성적인 구분이 아니라 한 인간이 어려운 시절을 겪고 나서도 생명의 강한 의지, 존엄성과 자존심으로 버티며 작은 성취를 얻어낸 것에 대한 대리만족이 컸어요. 형식적으로 처음 2~3일간 대본을 보면서 고민했지만 당연히 내가 해야겠다, 이거 안하면 배우생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었죠.”

 

 

지난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나문희 이제훈 주연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면서 깊은 감동에 빠졌다. 특히 선배 여배우 나문희가 눈에 밟혔다. 김희애는 “선배님이 ‘아이 캔 스피크’를 하면서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골방에서 얼마나 고민했을까부터 시작해 대본 연습했던 게 다 보였다”며 “그래서 더욱 존경스럽고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허스토리’ 역시 감동의 무게는 다를 바 없다. 박정자 김해숙 문숙 예수정 이용녀 등 연기구력 대단한 여배우들과 공연하는 귀한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새 거는 금방 만들 수 있지만 내공 깊은 배우가 나오려면 최소 30~40년은 걸리잖아요. 이런 분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죠. 현장에서 그분들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절로 ‘쉽지 않은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인간의 모습’이 느껴져요. 선생님들뿐만 아니라 김선영씨는 힘이 엄치고 감성이 풍부해서 자극을 많이 얻게 되는 동료이고, 이유영씨는 가냘프고 보호해주고 싶은데 단단하게 제몫을 해내는 점이 좋았어요. 한 작품 안에 세대별 여배우가 균형있게 분포돼 있기가 쉽지 않은데 ‘허스토리’는 가능했기에 안정적인 느낌이었어요.”

사진= YG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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