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신’이 신의 품에 안기게 됐다.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전세계 축구팬들은 슬픔에 잠겼고 그가 세운 업적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펠레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축구선수로 꼽히는 마라도나는 축구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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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현지시각) 마라도나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 티그레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그가 뇌 수술을 받은지 3주 만이다. ‘축구 황제’ 펠레는 물론, 펠레와 마라도나의 뒤를 잇고 있는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마라도나를 추모했다. 전세계가 마라도나를 이야기하고 있다.

196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마라도나는 76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프로 데뷔했다. 그의 운명을 바꾼 건 1977년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발탁 순간부터였다. 1982년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포클랜드 영유권 분쟁으로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됐지만 아르헨 국민들은 계속 영국에 반감을 가지게 됐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4강전에서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를 만났다. 불과 4년 전 전쟁을 치른 두 국가의 축구 대결은 실제 전쟁을 방불케 했다. 이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역대 최고의 골과 역대 최고의 논란을 만들어냈다. 자기 진영에서 드리블해 원더골을 넣었고 일명 ‘신의 손’이라고 불리는 핸드볼 골도 기록했다. 당시 마라도나는 “내 머리와 ‘신의 손’이 함께 만들어낸 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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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를 꺾은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대회 MVP로 선정된 마라도나는 일약 국가적 영웅이 됐다. 누군가의 원맨쇼로 한 국가가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건 펠레 이후 처음이었다. 단숨에 20세기 대표 축구선수가 된 마라도나에게도 어두운 시절이 있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도중 도핑 테스트에 적발돼 중도 귀국해야 했고 마약 중독 치료도 몇 차례 받았다. 마약과 알코올 복용, 비만 등으로 과거에도 심장 문제를 겪는 등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문제적 발언, 기행들도 언론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일쑤였고 사생활 문제도 터져나왔다.

하지만 마라도나의 축구 실력을 가지고 태클을 거는 이는 없었다. 아르헨티나 보카 주니어스, 스페인의 FC바르셀로나와 세비야, 이탈리아 나폴리 등을 거친 마라도나는 작지만 단단한 몸에 화려한 드리블, 위력적인 왼발 킥으로 그라운드를 평정했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A매치 91경기에 출전해 34골을 넣었다.

1997년 선수 생활 은퇴를 선언한 그는 2008년부터 아르헨티나 대표팀 감독직을 맡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 8강전에서 독일을 만나 대패하며 지휘봉을 내려놓았지만 그가 리오넬 메시와 함께 감독, 선수로 만났다는 건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뜻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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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나는 역대 최고의 선수에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었다. 펠레를 제치기도 하고 펠레 다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만큼 축구계에서 마라도나의 존재는 ‘신’ 그 자체였다. 그의 별세 소식에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3일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이탈리아 세리에A 나폴리는 홈구장 이름을 마라도나 이름으로 변경하는 걸 고려하고 있다.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 전 마라도나를 위해 선수들이 추모 의식을 치렀으며 너나 할 것 없이 SNS를 통해 애도를 표했다. 아르헨티나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도 “축구 시인이 떠났다”고 슬퍼했다.

그는 축구 역사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실력과 개성, 스타성을 모두 갖춘 선수였기 때문이다. 60세의 짧은 일기로 떠난 마라도나. 그를 상징하는 등번호 10번과 ‘D10S’ 문구가 영원히 축구팬들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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