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올라간 아이라인과 진한 립스틱, 드레스 대신 팬츠를 입은 채 열정적 무대를 선보이곤 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가 5년 만에 국내 리사이틀에 나선다. 공연장에서는 치열하고 섬세하게 청중에게 말을 걸어오고, 일상에서는 자유로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를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마주했다.

지난 2014년 ‘보이스Ⅰ’이 전쟁 속 인간의 본질 탐구를 바탕으로 세상을 향해 던진 메시지였다면 11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리는 ‘보이스Ⅱ(부제: 지난 밤 꿈속의 이야기)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무대다. 프로그램은 음악에 입문하던 시기 반복재생하며 들었던 멘델스존과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아름다운 소품들로 꾸몄다.

바이올린이란 악기와 사랑에 빠지도록 해준 브람스 ‘헝가리 무곡’ 1번, 엘가 ‘변덕스러운 여자’, 파가니니 ‘칸타빌레’, 폴디니 ‘춤추는 인형’, 바치니 ‘요정의 춤’ 그리고 이자이 ‘생상스 왈츠 형식에 의한 에튀드 카프리스’ 등 친숙한 곡들이 대거 포진했다.

“워낙 슈만을 좋아하니까 슈만을 중심으로 정한 뒤 친구였던 멘델스존을 선택했고 2부에서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음악이 가장 좋았던 첫 기억이 뭐였을까를 생각했어요. 연주하는 게 의미 있는 일임을 깨달았던, 사랑에 빠졌던 틴에이저 시절을 상기했죠. 웅장한 심포니와의 협주곡이나 현악4중주, 소나타가 아니라 소품들이더라고요. 정경화 선생님, 막심 벤게로프가 연주했던 곡들을 들으며 너무나 신나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어요. 관객분들도 이 곡들을 통해 음악이 정말 멋진 거구나, 제가 겪었던 애정과 두려움, 희망과 좌절의 감정을 함께 느껴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의 입문 음악’으로 꾸몄어요.”

곡 수가 많으면 연주자 입장에선 부담스러울 법한데 음악이라는 문화예술 자체를 사랑해줬으면 하는 마음이라며 재삼 강조한다. 활자는 오래 남지만 소리는 찰나의 순간에 사라진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욱 빛난다고 여긴다.

“불과 몇 초 머무르지 않는 소리로 사람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게 여전히 신기하다”는 그는 “그런 기쁨을 공유했으면 한다”며 이번 무대에 임하는 소감을 때론 격정적으로, 때로는 재기발랄하게 토로했다.

특히 긴밀한 호흡을 주고받을 반주자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이타마르 골란이 함께한다. 살아있는 감정 그 자체를 연주한다는 평판의 솔로이스트로도 탁월하지만 정경화, 바딤 레핀, 막심 벤게로프, 재닌 얀센 등 내로라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들과 함께 금빛 앙상블을 일궈온 아티스트다. 조진주와 골란은 지난해 미국에서 무대에 함께 올라 폭발적인 에너지와 환상의 호흡을 보여준 바 있다. 특히 한국인 연주자로는 정경화에 이어 조진주가 두 번째다.

“너무 퀄리티 높은 음악가세요. 그분과 연주를 하면 그동안 나에게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들게 돼요. 신기할 정도죠. 그가 지닌 날것의 에너지가 사람의 혼을 빼놓는 경향이 있어서인가봐요. 이상한 짓을 하게 만들어요.(웃음) 골란과 협연한 벤게로프와 정경화 선생님의 슈만 앨범은 지금까지도 명반으로 추앙받고 있을 정도예요.”

클리블랜드 유학 시절부터 체류해오던 미국을 떠나 자신과 똑닮은 젊고 진보적인 도시 캐나다 몬트리올에 둥지를 튼 채 지내고 있다. 맥길대 정교수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연주 활동과 후학 양성이라는 ‘투잡’을 특유의 추진력과 파워로 해내고 있다.

“1년 6개월째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교수들의 연주활동을 장려하고 배려를 많이 해줘서 무대에도 소홀함이 생기지를 않아요. 기본적으로 전 노는 거에 익숙하질 않은 인간형이에요. 연주 중간시간에 연습만 하고 지내기에는 심심하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좋아요. 오히려 학생들에게서 제가 더 많이 배우고요. ‘쟤도 저리 잘하는데 연습 좀 해야겠다’란 자극을 얻고요. 뜻깊은 일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 자존감이 많이 올라갔어요.”

미국 유학시절이던 2006년 몬트리올 콩쿠르 1위, 20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 콩쿠르 1위, 2011년 윤이상국제콩쿠르 2위, 2012년 앨리스&엘레노어 쇤펠드 콩쿠르 1위, 2014년 인디애나폴리스 콩쿠르 1위를 차지하며 국제무대에 핫샷 데뷔했다. 대학생 시절이던 2010년부터 모국인 한국에서 연주활동을 시작. 10년째를 맞았다. 한 세대를 가로지르며 크고 작은 변화, 성장이 그에게 일어났다.

“올해는 성취보다는 행복이 조금 더 중요한 해였던 것 같아요. 안정과 행복이 이뤄졌죠.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게 많을 때, 새로운 자극이 주어질 때 가장 행복함을 알게 되기도 했고요. 낯선 곳으로 생활터전을 옮긴 뒤 빨리 안정을 찾았고, 학생들을 교육하면서 감사하고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게 됐어요. 연주자로서도 올해만큼 협업을 많이 한 해가 없었어요. 이젠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감이 잡혀요.”

연말이니 자연스레 신년 계획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 “영화 ‘기생충’의 명대사처럼 노 플랜이 가장 좋은 플랜이라잖아요”.

그래도 가슴에 품은 알토란 같은 계획들이 빼곡하다. 5년째 공을 들여오고 있는 ‘앙코르 페스티벌’이 내년 6월부터 7월까지 국제음악회가 열리는 통영에서 개최된다. 클래식 음악계 미래의 주인공들과 현역 연주자들이 어우러지는 한마당을 보다 알차게 꾸미기 위해 벌써부터 기획과 섭외에 시간을 허락하고 있다. 가까이는 문체부 주관 ‘신년음악회’에서 베토벤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를 위한 삼중협주곡 연주를 한다.

7월에는 쇤펠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며 롯데콘서트홀 ‘토요 엘콘서트’ 등 다채로운 콜라보 행진을 벌여나간다. 새 앨범을 기다리는 팬들이 많아 어떻게든 발매하려고 노력 중이다. 바쁘게 살 운명의 연주자다.

사진= 봄아트프로젝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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