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제’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 신영숙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뮤지컬계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최근 한 뮤지컬에선 신영숙이 솔로 넘버를 열창한 직후 타이틀롤 남자 주인공을 뛰어넘는 박수 세례가 터져나왔다. 

매 작품 무대를 장악하는 그녀가 올해 마무리와 내년 상반기를 ‘레베카’와 함께한다. 2013년 초연 때부터 무려 5번째 ‘레베카’ 그리고 동일한 역인 댄버스 부인이다. 지난 5일 만난 신영숙은 설렘 반 자신감 반으로 캐릭터를 그려낼 준비에 한창이었다.

사진=EMK엔터테인먼트

“초연 때 댄버스 부인 역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오리지널 캐스트의 공연 영상을 찾아봤어요. 댄버스 부인이 부르는 넘버 ‘레베카’의 멜로디가 중독성 있더라고요. 지금도 공연 끝나면 관객들이 흥얼거릴 정도인데 그때 제게도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댄버스 역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열심히 준비해서 오디션을 봤어요. 다행히 전에 ‘모차르트!’때와 같은 작곡가(실베스터 르베이)시더라고요. 그분이 제 목소리에 서늘하고 센 음색이 있는데 댄버스 부인과 잘 어울리겠다는 힌트를 주셨고 오디션을 봤는데 ‘네 유니크한 음색과 너무 잘 어울린다’라고 말씀해주셔서 오디션에 통과할 수 있었죠.”

“댄버스 부인 역으로 무대에 5번이나 설 수 있었던 건 관객들이 좋아해주셨고 역할을 어느 정도 잘했다고 인정해주셨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매력 있는 역할을 언제 맡아볼 수 있을까요. 사랑받을 수 있어 감사하고 저에겐 큰 행운이에요. 영광스럽죠.”

5번째, 이만하면 익숙해질 만도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신영숙은 여전히 캐릭터의 내면을 파고들며 공부 중이다. 댄버스 부인은 남자 주인공 막심 드 윈터의 아내 레베카가 죽은 후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저택 곳곳에 그녀의 흔적을 소중히 간직하는 기이한 내면을 지닌 인물. 신영숙은 5번째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를 잃은 슬픔보다 분노를 더 강렬하게 표현할 거라 설명했다.

사진=EMK엔터테인먼트

“전엔 슬픔이 있었는데 이젠 분노가 커졌어요. 더 무서워질지도 모르겠네요. 계속 분석하고 연기하다 보니까 슬펐던 마음이 분노로 가더라고요. 오늘도 11시에 런스루를 하고 왔는데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더라고요.

댄버스 부인을 몇 년에 걸쳐 소화하면서 내면 연기가 더 깊어지는 듯해요. 나이를 먹고 삶을 경험하면서 캐릭터에 녹아드는 거 같아요. 처음엔 일견 싸이코 같은 역할이니까 외적인 모습을 부각하려 했다면 지금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됐는지 고민하고 표현해요. 싸이코니까 눈만 희번득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 손동작과 눈빛이 나오는지 생각해요.

초연 땐 멋지게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컸어요. 그런데 여러 번 하니까 기본적인 연습이 돼 있는 상태에서 반복하다 보니 깊이가 생기네요. 외적인 부분과 내적인 부분이 맞닿아서 시너지가 일어나요. 이번 공연엔 관객들이 댄버스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빨려들어가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신영숙은 수년에 걸쳐 ‘레베카’ 역대 캐스트를 낱낱이 알고 있다. 올해 캐스트로는 류정한, 엄기준, 카이, 신성록, 옥주현, 장은아, 알리 등이 출연진 공개만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에게 이번 캐스트 중 반가운 사람은 류정한이었다. 그는 “초연 때 같이 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류정한에게)고급스러운 분위기가 있다”라며 “한국엔 귀족문화가 없어서 귀족 역할의 막심 드 윈터를 연기하기 쉽지 않은데 류정한 선배에게는 그 분위기가 있다. 복귀하셔서 굉장히 기대되고 반갑다”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사진=EMK엔터테인먼트

올해로 데뷔 20주년을 맞은 신영숙은 자신의 커리어에 대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고 말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이야 뮤지컬계 대표 배우로 입지를 굳혔고 나왔다 하면 화제작 반열에 오르지만 처음은 그렇지 않았다. 20대부터 앙상블로 시작해 30대를 거쳐 현재 40대에 들어서며 주연급 역할을 더 많이 맡으며 ‘대세’ 행보를 걷고 있다.

“20대 때 오디션 떨어지고 울면서 집에 갔던 기억이 있어요. 당연히 된 줄 알고 기고만장했는데 전화가 와서 떨어졌다더라고요. 반복되면서 익숙해졌어요. 그땐 남들보다 외모와 몸매가 뛰어나지 않았고, 조금씩 발전해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작든 크든 매번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왔어요.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연기, 노래 선생님을 따로 찾아가서 배웠어요.

20대 때는 코믹 장르를 사랑해서 재미난 역할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캣츠’의 그리자벨라 역 오디션에서 1등을 한 거예요. 그때부터 진지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고 캐스팅 제의를 받아가면서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넓혀왔어요. 한 단계씩 매 자리에서 역할을 잘해왔기에 더 큰 기회가 찾아오는 거 같아요.”

나이가 들어 더 빛을 발하는 신영숙은 매사에 철저할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자기관리에 힘쓰지 못한단 고백을 털어놨다.

“성대는 타고났어요. 공연 끝나고 맥주 한 잔씩 해도 크게 지장이 없어요. 사실 그러면 안 되는데 맥주 한 잔을 포기하지 못하겠어요. 그게 또 쉬지 않고 작품 하는 재미거든요. 또 아무리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려 해도 라이브 공연이니까 실수하지 말아야겠다는 기본적인 긴장감이 있어요. 한국 뮤지컬계는 캐스트에 민감하잖아요. 제가 출연하기로 약속한 날은 펑크내지 말고 약속을 지켜야죠. ‘피켓팅’(피 터지는 티켓팅을 의미하는 신조어)으로 기다려온 관객 마음을 알기에 실망시키지 않으려 해요. 배우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진=EMK엔터테인먼트

40대가 돼서도 뮤지컬 ‘엘리자벳’의 16세 캐릭터부터 ‘부인’이란 명칭이 붙는 다소 무게감 있는 캐릭터까지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소화하는 뮤지컬 ‘여제‘ 신영숙에게도 인지도에서 기인한 고민이 있다.

“뮤지컬 전문 배우니까 인지도가 부족하긴 해요. 지금도 대중 스타들보단 부족하죠. 어떻게 하면 그 부분을 메꿀 수 있을까 고민해요. 지금보다 인지도가 부족할 때 한 뮤지컬 오디션에서 1등을 했는데 (유명하지 않아서) 출연하지 못했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방송에 나가야 하나 고민했고 지금도 그래요. 뮤지컬 전문 배우로서의 고민이죠.”

“선택되지 못한 좌절감이나 체력적으로 힘들 때 제가 힘을 내게 하는 건 관객들이에요. 팬들이 주는 편지를 다 읽는데 공연을 통해 힘 낸다는 이야길 들으면 저도 힘이 나요. 내가 사랑하는 일을 하는데도 남들에게 힘을 줄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 배우는 관객이 있고 봐줄 사람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제 팬들은 저를 ‘마마님’이라고 불러요. 30대 초반 때인가 뮤지컬 ‘이’에서 장녹수 역할을 했어요. 17년 된 일이네요. 그때 ‘녹수마마’라고 불리면서 팬카페가 생겼어요. 녹수마마가 길어서 마마님이라 하기 시작한 건데 요즘은 일본 관객들도 마마라고 하더라고요(웃음). 그 분들은 이유는 몰라도 애칭으로 부르는 거죠. 아무래도 제가 나이를 먹었으니 공주보단 마마가 나은 거 같아요.“

앙상블부터 역할 하나하나를 거쳐 주연까지 버티는 일은 쉽지 않다. 20년 동안 신영숙이 뮤지컬을 계속 해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힘든 일은 잊고 좋은 일만 기억하려 했던 성격의 덕이 컸다.

“최근에 있었던 기뻤던 일로는 20주년 감사 콘서트가 있어요. 무명 때부터 20년 가까이 봐줬던 팬들과 최근에 콘서트를 했던 기억이 행복하게 남아 있어요. 또 전부터 ‘엘리자벳’의 엘리자벳 역할을 꿈꿔왔는데 올해 그 역할을 할 수 있어서 기뻤어요, 예전에 공연이 한국에 들어오기도 전에 팬카페 회원이 오스트리아 공연 대사집을 번역해서 책을 제본하고 선물해줬어요. 엘리자벳 초상화에 제 얼굴을 합성하고 이 역할이 제게 너무 잘 어울린다면서요. 다 때가 있고 인연이 있나봐요.“

마지막으로 이번 주말 16일 개막을 앞두고 "무수히 많은 작품을 했지만 주변 지인들이 너무 재밌다고 말해준다"라고 '레베카'를 설명한 그녀. 말을 빌리자면 '2막에선 숨소리도 안 들리게 몰입되는 작품', 그 안에서 완벽하게 댄버스 부인으로 빙의해 무대를 쥐락펴락할 그녀의 모습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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