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가 노랗게 물들어가던 날, 성수동에서 ‘슈퍼밴드’ 우승을 거머쥐며 주목을 한껏 받고 있는 호피폴라의 리더 아일(25·노정훈)을 만났다. 블랙 라이더 재킷을 걸친 청년이 슈퍼밴드, 호피폴라, 형과 어머니, 음악인생에 대해 말폭탄을 터뜨렸다.

“호피폴라 데뷔앨범을 준비 중이에요. ‘슈퍼밴드’와 ‘불후의 명곡’에 출연하면서 음악적 아이디어를 많이 써버려서 이젠 음반을 위해 축적해 놓으려고요”라고 말하는 눈빛이 설렘으로 반짝였다.

“아직 팀 소속사가 정해지질 않아서 확정된 이후 추진력을 얻을 것 같아요.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음악을 담아내자고 합의를 한 상태예요. 전부 창작곡으로 수록할 거고 장르도 아주 다양할 거예요. 멤버 전원이 곡을 쓰고 있어요. 첼로와 기타 연주곡도 수록될 거고요. 저의 경우 이제까지 30곡 이상을 만들어놨는데 요즘 새로 곡을 쓰고 있어요.”

JTBC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밴드’ 론칭 당시 단발머리 꿀피부, 특이한 이름(I’ll)을 가진 청년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미 2017년 싱글 ‘메이비 위 아’를 발표한 기성이었으나 낯선 참가자는 건반을 연주하며 섬세한 미성으로 케니 로긴스의 ‘코디스 송’을 불러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이전 세대의 음악 선곡이라 젊은 층에게는 생소한 음악일 텐데 이채로웠다.

“어머니도 예전에 일본에서 가수활동을 하셨고 유년기부터 올드팝이나 월드뮤직을 많이 접했어요. 첫 등장이라 고민을 많이 했죠. 요즘 세대 음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자라나며 들었던 음악적 코어를 보여줄 것인가. 도박이긴 했지만 후자를 선택했어요.”

팀을 이뤄 부른 방탄소년단 ‘봄날’은 큰 화제를 뿌렸다. 느리고 서정적인 도입부에 이어 록과 펑키가 어우러진 신나는 리듬으로 아일 식 ‘봄날’로 재해석해냈기 때문이다.

“올드팝을 보여줬으니까 이번엔 밀레니얼 세대가 좋아할 음악으로 ‘봄날’을 선택했어요. 더욱이 제가 싱어송라이터를 꿈꿀 때 올드&뉴의 조화를 잘 이루는 에드 시런과 같은 음악을 추구했기에 승부수를 던졌죠. 워낙 방탄소년단 팬층이 두터워 제작진도 위험하지 않을까 우려했어요. 그럼에도 멤버들이랑 상의한 끝에 ‘꼭 보여드리고 싶다’고 주장했죠. 결과는 팀 패배라 마음이 아팠어요. 멤버들 각각의 매력을 제대로 못살려줬구나 싶어서 후회도 했죠.”

1라운드까지는 ‘슈퍼밴드’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단다. “멋있는 음악만 하면 됐지”라고 여겼다. 하지만 멤버, 악기 하나하나의 조화로운 결과물을 추구하는 프로그램의 방향성을 이해하면서부터 달라졌다. 2라운드부터 ‘조화’에 초점을 맞췄다.

“멤버들의 생각을 계속 물어보면서 만족할 때까지 수정을 거듭했어요. 참가자들 대부분이 완성형 뮤지션인데 리더라고 명령하는 시스템은 맞지 않았고요. 서로 의견을 말하는데 있어서 언어(프로듀서·클래식·실용음악 출신)가 조금씩 달랐을 따름이에요. 다행히 전 클래식 연주, 프로듀싱, 송라이팅을 다 경험해 봤기에 가교 역할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잘 섞을 수 있도록 조력한 거죠.”

짜릿한 역전타를 터뜨린 곡이 제리드 제임스의 ‘1000X’ 커버 무대였다. 다른 팀에서 연패하던 하현상을 데리고 와 처음 도전한 무대에서 의기소침해 있던 하현상에게 첫 승리의 벅찬 감동을 선물해줬다.

“전 보컬에서 빠지고 현상이를 밀어줬어요. 승부수였는데 잘 받아들여져 신났죠. 4라운드에선 자율조합이 됐어요. 이제부턴 승패와 상관없이 나아가자고 팀원들과 의견을 모았어요. 떨어져도 괜찮으니 다들 색깔만 확실히 보여주자고.”

그런 기운으로 나온 곡이 라디오헤드의 레전드 송 ‘크립’이었다. 제작진부터 친한 참가자들에 이르기까지 “욕먹을 확률 많은 선곡” “위험한 선택”이라며 말렸다. 하지만 경연 무대는 놀라웠다. 불온한 청춘의 표상 같은 하현상의 우울한 보컬과 아일의 따뜻하고 유려한 보컬이 꽉 짜인 앙상블을 이뤘고, 홍진호의 첼로와 김영소의 기타 선율이 이를 눈부시게 뒷받침했다. 프로듀서 윤종신 김종완은 비판했고, 윤상은 호평했고, 조한은 극찬했다.

“바에서 혼술하거나 홈술하면서 ‘슈퍼밴드’를 시청하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크립’은 딱 혼자 술 마시며 들었을 때 가슴 저리게 다가오는 곡이거든요. 저희 멤버들끼리는 좋았어서 우리 색깔로 밀어붙였죠. 현악기 3대와 건반 편성에 처음엔 굉장히 우울하게 시작했다가 후렴부터 빛이 보이는 아련함, 다시 절규로 이어지는 구성을 취했고요. 노래가 끝난 뒤 심사위원들이 안좋게 말씀하셨을 때 충격을 먹어 식은땀이 흘렀어요. 그러다 조한 님의 극찬에 ‘몇몇은 설득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죠. 그런데 최고점이라니!”

결고운 미성의 가수는 흥미롭게 ‘슈퍼밴드’ 전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찾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고개가 갸우뚱 거려진다.

“록, 발라드, 브리티시 록 등을 다 좋아해서 이리 부르고 저리 부르고 그래서 제 색깔을 잘 몰랐어요. 고민을 많이 했었죠. 그러다 현상이를 만나게 되면서 (현상이가) 슬픔 많은 목소리라 자연스레 저도 서정적인 목소리로 융화가 됐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호피폴라 색깔이 서정적인 보컬의 하모니로 자리매김하게 된 거죠.”

‘슈퍼밴드’ 녹화 현장에서 들었을 때 가장 압도적인 팀으로 퍼플레인을 꼽는다. 음악적 색깔이 아름다웠던 팀은 루시였다. 최종 결선에서 바로 앞 팀이 록 보컬리스트 채보훈이 이끄는 퍼플레인이라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편하게 경연에 임했다. ‘웨이크 미 업’에서 첼로를 튕겼을 때 관객들이 소리를 질러 의아했다. 발을 동동 구를 때, 북을 두드릴 때, 첼로를 돌릴 때 환호가 터지나와 시니 났다. 아티스트로서 경험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고, 벅차서 눈물이 났던 첫 무대였다.

5살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고교시절 잠시 밴드활동을 하다가 연극부에 들어가 연극영화과 입시 준비를 했다. 대입에 낙방한 뒤 형(가수 겸 배우 노민우)의 권유로 미국 버클리음대에 피아노 전공으로 유학을 떠났다. 2학년부터 싱어송라이터를 꿈꾸며 작곡을 전공했고 노래도 열심히 하게 됐다. 그런 모먼트에서 형은 큰 영향력을 미쳤다.

아일에게 형 노민우는 아버지이자 친구와 같은 존재다. 아버지의 부재 속에 자란 그를 아홉 살 터울 형은 든든하게 돌봤다. 엄하게 혼내면서도 늘 같이 놀았고 음악 트레이닝, 패션뷰티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성인이 된 지금도 자주 불러내 식사하고 영화도 함께 관람한다.

“연기에 미련이 있어서 기회가 되면 도전해보고 싶어요. 뮤지컬 음악을 작곡하면서 연기하고 싶다는 좀 더 구체적인 꿈을 꾸고는 하죠. 음악영화에 대한 욕심도 있고요. 50대가 됐을 때 뮤지컬이든 영화든 음악감독이 돼 있을 것 같아요.”

사진=지선미(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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